자녀의 자유 의지를 배려한 훈련


교회 사람들과 함께 어느 가정에서 모임을 갖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과를 나누고 있는데 만 두 살이 안 된 아이 하나가 와서는 자기 손으로 빵을 집어서 장난감 방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빵을 먹으면서 놀 속셈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부모는 아이가 앉아서 먹는 연습을 시키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아이에게 말했지요.

“A야, 돌아다니면서 먹지 않아요. 여기로 오세요. A야, A야, A야~!”

부모의 목소리는 조금씩 커져 갔지만, A는 못 들었는지, 못 들은 체 하는 건지, 제 갈 길을 갔습니다. 더 이상 언성을 높이길 원치 않았던 ‘착한’ 부모는 결국 아이에게 져 주고 말았지요. 어른들끼리 대화 중이었고 바쁘게 교제를 나누느라 그 이상 신경 쓰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요.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송용이 일어나서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고는 그 아이의 빵 잡은 그 손목을 지긋이 잡았지요. 뭔가 살짝 힘이 느껴질 정도로 꾸욱 눌러서 말이에요. (물론, 그 아이와 송용은 자주 만나서 어느 정도 신뢰 관계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송용은 그렇게 A의 손목을 잡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A를 살살 몰아서 빵 접시 앞으로 돌아갔답니다. 손목이 잡힌 아이는 자기 손에서 빵을 놓지 않은 채 그대로 이끌려 왔지요.

그 다음 송용은 A의 빵 잡은 손을 빵 접시 위로 가져왔습니다. 그러고는 말했지요.

“이제 A가 빵 놓으세요. 방금 아빠 엄마가 돌아다니면서 먹지 않는다고 말했죠? A가 직접 여기에 빵 내려 놓으세요.”

만 두 살 난 A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빵을 놓았을까요? 울어버렸을까요? 아님 뒤집어졌을까요?

그 아이는 순순히 자기 손에서 빵을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장난감 방으로 향했지요.

보통 그런 상황에서 부모들의 대처는 두 가지 정도입니다. 첫 번째, 위의 상황처럼 빵 놓고 가라는 말을 앉아서 반복만 합니다. 그럼 아이들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지요. 그렇게 부모는 엉덩이를 굳세게 붙인 채로 말만 하다가 끝납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불순종함으로써’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승리를 체험하지요. 아주 안 좋은 강화의 예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빵을 들고 다니는 아이를 보다 못해, 부모가 그 아이의 손에서 빵을 낚아채 옵니다. 그럼 아이는 질 새라 잽싸게 가서는 그 빵을 다시 집지요. 그 때부터 부모와 아이 사이에 서로 뺏고 뺏기는 일이 몇 번 반복됩니다. (그런 식으로 뺏긴 경험이 쌓인 아이는 또 누군가의 손에서 물건을 뺏는 습관을 갖게 된답니다. 각설하고.) 그러다가 아이가 제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아이는 빽~ 하고 울어 버립니다. 그럼 그 아이는 더 혼나겠죠. 혹시 운이 좋으면 부모가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까봐 “그래, 알았어, 알았어, 울지 마” 하면서 빵을 건네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아이를 위해 좋은 일은 아니겠죠?

모든 훈련은 아이 스스로 그 일을 즐겨 지키도록 부모가 돕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이 지키길 원하시지 억지로 지키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스스로 그 일을 지키도록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요?

짚고 넘어가야 할 여러 포인트들이 있지만, 이번 호에서는 아이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도록 돕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그 분을 따르길 원하셨기에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지요. 그렇기에 모든 사람에게는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랍니다.

물론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훈련 시키다 보면, 그들의 고집을 꺾고 순종을 훈련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어느 정도 강제성이 부과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럴 때에도, 가능하면 마지막에는 그 아이가 스스로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면 좋습니다. 앞의 예에서처럼, 아이의 손에서 당장 빵을 뺏어오는 대신, 아이의 손목을 잡은 채로 아이가 자신의 의지로 빵을 떨구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억지로 시키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억지로 공부 시키고, 억지로 봉사 시킵니다. 억지로 야근 시키고, 억지로 술도 먹이지요. 평생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고 사회 생활을 하다 보니, 억압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억압적인 분위기를 기뻐할 영혼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자기에게 억지로 시키는 일을 피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복음 6:15)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억지로 문화’는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학습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교육 시스템의 상당 부분이 그런 ‘억지로 문화’에 젖어 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현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경우 제한된 선택을 주는 방법으로 아이들의 의지를 존중해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에게 방을 정리하라고 했을 때에, 자기는 하기 싫다면서 버틸 수 있겠지요. 그러면 부모가 얘기합니다.

“지금 방 청소를 할래, 아님 30분 후에 할래? 그건 네가 선택하렴. 대신 네가 선택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거야.”


그러면 아이 입장에서는 약간의 선택의 여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여지가 아이에게 숨쉴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해 줍니다. 그러면 의외로 아이들은 자신이 선택한 것들을 또 잘 지켜 내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조금 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실, 순종 훈련은 초등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등 시기는 마지막 훈련 시기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청소년 시기에 변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요.

청소년들에게는 일단 올바른 방향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논리가 발달되는 시기이기에 논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더라도 의지가 따라주지 않는 경우들이 있지요. 그렇기에 청소년들에게는 옳은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주되,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부모가 기다려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요.

“엄마는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단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네가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엄마는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린다고 해서 그 때까지 너한테 불만을 품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렴. 엄마는 네가 항상 자랑스러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단다. 네가 스스로 그렇게 될 때, 엄마한테 얘기해 줄래? 네 스스로의 결정으로 성장하는 순간이 엄마에게는 큰 기쁨이 된단다.”


자녀 훈련의 기준 자체를 낮출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준은 철저하게 유지해야 하지요. 다만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과 부모의 기준을 따라올 수 있도록 지혜롭게 여지를 남겨 둔다면, 우리는 더 아름다운 열매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지요? 그 분은 절대적인 거룩과 공의의 기준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오래 참고 기다려 주셨을 뿐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그 분을 따르고 싶어 질 때까지!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시편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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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낮은울타리 9월호에 연재되었습니다.

#자녀양육 #자유의지 #훈련 #억지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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